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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콩쥐마리아 - 이경자

2023-08-08

ⓒ Getty Images Bank
공장에 다닐 땐 효녀라고 별명이 콩쥐였다.
어쩌다 명절에 다니러 오면 머리 허연 할아버지도 콩쥐야? 따뜻하게 불러줬었다.

위로 셋이나 되는 오빠들은 하나같이 상급학교로 진학하려 기를 썼고
아래 여동생이 식모살이 몇 해 월급을 가불해서 바쳐도
언제나 헛헛한 표정으로 빈손을 벌리며 콩쥐를 쳐다보았다.

월급날만 되면 어머니가 방직공장 정문에 와서 봉투째 받아 갔고,
월급날이 아닐 때도 교복 입은 오빠들이 번갈아 와서 손을 벌렸다.
언제나 옆에서 빌리고 뒤에서 빌려 오빠들을 웃는 얼굴로 돌려보냈다.
그 기쁨을 남들은 몰랐다.
나중에 출세하면 누이동생 우쭐하게 호강시켜줄 거라고
묻지 않은 말을 들을 때의 콧날 시큰해지는 행복을 누구도 몰랐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할머니의 거칠고 흔들리는 목소리를 듣는 동안 
마리아는 또 다시 오빠들을 떠올리고
백일도 못 살고 헤어진 첫 번째 남편을 떠올리고
그 남편에게 잠깐 맡기겠다고 한밤에 놓고 나온 딸 경아를 떠올리고,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제 나라 말로 욕하고 싸웠던 앤드류를 떠올렸다.

이민 서류 만들어 초청했는데도 
이민 생활 고달프면 마구 패고 행패 부렸던 둘째와 셋째 오빠,
행여 자신들의 오늘을 양갈보 누이가 만들었다 알려질까 전전긍긍하는 피붙이들...

마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 나쁜 생각들이었다.


# 인터뷰. 전소영
모자이크가 되긴 했지만 마리아 할머니는 결국 본의 아니게 방송 출연을 하게 되죠. 그래서 분노한 오빠로부터 호통을 들었지만 오히려 앓고 있던 병이 낫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 과거의 경험이 비록 비참한 것이라 해도 자신의 현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할머니는 자기와 상관없이 과거를 숨겨야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가 부정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간접적으로라도 자신이 희생과정이 알려지자 마음이 조금은 풀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마리아 할머니는 다시 무심해집니다. 
마리아 할머니를 취재한 방송도 여성들의 자기 희생을 기린다는 취지를 내세우긴 했지만 자극적이 풍경을 보여주는 데 그쳤고, 주변 사람들도 모자이크 속에 여성이 누군지 밝혀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씁쓸한 환경 속에서 마리아할머니는 무심함으로 자신을 지켜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한국 이민 백 년사의 초석은 
우리가 ‘양색시’라고 경멸해 부르기를 서슴치 않는 여성들의
‘자기희생’을 토양으로 했다는 말로 인터뷰를 맺었다.
그가 말하는 1분 동안 화면은 한국전쟁 이후의 기지촌 풍경을 다양하게 보여줬다.
의정부, 동두천, 평택, 송탄 등지의 기지촌에서
짙은 화장을 한 한국인 여성과 미군들이 뒤섞여 걷거나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전쟁직후는 흑백의 낡은 필름이고 
외화획득에 물불 안 가리던 경제개발 시대의 것은 컬러 화면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리아는 이 뉴스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노인회관의 구석구석에선 자신들의 이민 역사보다 
이곳의 어떤 여자가 과연 기지촌 출신인가를 알아내려는
병적인 호기심으로 한동안 뒤숭숭했다.

물론 마리아에 대한 오빠들의 실망과 분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그런데 오빠들의 호통을 들은 후에 
마리아는 흡사 오랜 질병에서 회복된 기분이었다.
정신이 맑아오는 걸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무심해졌다.



작가 이경자 (강원도 양양, 1948.01.28.~ )
    - 등단 : 1973년 단편소설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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