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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부 남북 이산가족 첫 상봉, 남북 교류의 장을 열다

#광복80, 대한민국 l 2025-08-18

광복80, 대한민국

분단 이후 남북한 첫 접촉
1971년 대한적십자사가 북측에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적십자 회담을 제안하면서 남북 간의 공식 접촉이 시작됐다. 이후 1972년 남북은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통일 3대 원칙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남북 간 접근 방식의 차이로 현실적인 진전은 이루지 못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 KBS
1980년대 첫 상봉, 그리고 좌절된 기대
1984년 남한 수해 당시 북한의 인도적 지원 제안하면서 남북 교류가 재개됐다. 1985년 역사적인 남북 이산가족 첫 상봉이 이뤄졌다. 그러나 1987년 KAL기 폭파 사건, 북핵 위기와 김일성 사망 등으로 남북 관계는 경색됐고, 이산가족 상봉 논의도 정체에 빠졌다.

1985년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 - 1.4후퇴 때 헤어졌던 두 아들을 부둥켜안은 아버지
ⓒ KTV
1985년 평양을 방문한 남측 예술공연단(왼)과 서울을 방문한 북측 예술공연단(오)
ⓒ KTV
2000년 이후 재개된 상봉과 다시 멈춘 교류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을 계기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 6.15 공동선언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이 전격 합의됐다. 이후 대면과 화상 상봉이 이루어졌으나, 북측의 핵실험과 군사적 긴장 고조로 상봉은 다시 중단됐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후 상봉이 재개되었지만, 2019년 북미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또다시 멈춰선 상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 YONHAP News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 KBS
이산가족 문제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
2025년 2월 기준,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 4천여 명 중 생존자는 약 27%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고령이다. 거기다 탈북민의 증가로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 문제도 대두되고 있다. 이산가족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사안이 아닌 인도주의적 과제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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