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93주년을 맞는 3·1절이었습니다. 3·1절 하면 늘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관순 열사입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에 유관순 열사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시간을 1920년쯤으로 돌려서 보면 어떨까요. 당시 사람들에게도 유관순은 유명했을까요.?
대답은 의외로 ‘아니오’입니다. 3·1운동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해방이 될 때까지 유관순에 관하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3·1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대략 7천5백 명입니다. 그 가운데는 유관순만큼 혹은 유관순 보다 더욱 치열하게 투쟁한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았습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이 유독 유관순만 특별하게 기억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관순의 이미지는 해방 이후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누가, 왜 유관순을 역사의 무대 위로 끌어낸 것일까요?
해방 직후인 1946년 이화학당 출신의 두 여성 박인덕과 신봉조의 만남으로부터 유관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당시 이화학당의 후신인 이화여중의 교장으로 있던 신봉조가 동문 박인덕에게 ‘이화 출신 중에 국가와 민족에 공헌한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박인덕이 3·1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유관순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두 사람은 유관순을 널리 알리기로 하고 유관순 기념사업회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신봉조는 왜 이화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하려고 했을까요? 신봉조의 개인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신봉조는 이화 출신으로 일제 말기에 전형적인 친일파 노릇을 했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에 간부로 참여하여 한국인을 일제가 벌이는 전쟁터에 내보내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화 출신 중에는 친일 행적을 가진 이들이 많았습니다. 박인덕도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엘리트였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방이 된 조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스런 친일 경력을 가릴 방패막이가 필요했지요. 이화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해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죄과를 덮으려 한 것입니다. 거기에 딱 알맞은 인물로 유관순이 선택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유관순을 실제 이상의 영웅으로 신화화하는 데 몰두합니다. 박인덕도, 최초로 유관순의 전기를 쓴 전영택도 유관순을 잔다르크에 비유했습니다. 잔다르크는 백년전쟁 때 잉글랜드에 몰려 수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를 구한 신화적인 영웅이죠. 유관순을 조선을 구한 잔다르크로 표현하면서 유관순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신화적인 존재로 승격시켰습니다.
이후 유관순 기념사업회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한 이들을 회장 및 고문으로 위촉하면서 세를 불려갑니다. 특히 교육계 관료들이 참여하면서 그들의 활약으로 1950년대 중반부터 유관순은 각급 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됩니다. 이로부터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3·1운동 하면 유관순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역사 속에 실제 유관순은 어땠을까요? 그녀가 이화학당 시절 3·1운동에 참여한 것, 이후 고향인 충청도 병천으로 내려가 운동을 계속 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모가 일제에게 학살당한 것, 이에 더욱 분발하여 항일운동을 명렬하게 전개하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한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더 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해방 이후 일부 인사들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과대포장한 유관순을 이젠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역사토막상식, 아하 그렇구나! 오늘 이시간에는 3.1절을 보내며 유관순 열사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