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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라졌다.
그가 사용하던 휴대폰 번호는 존재하지 않는 의미 없는 숫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살고 있는 서른 평 남짓한 공간 속에
그의 존재를 증명해 줄 단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이제 내가 쓰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내가 이 집을 떠나야 할 날짜를 한 달이나 어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집을 나간 12월 1일은 우리의 다섯 번째 결혼기념이었다.
이제 나는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내가 알지 못하지만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소설가 T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십 년 동안이나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했던 소설가,
아니 어쩌면 그는 수많은 소설을 썼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의 소설들이 활자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설가 남편이 긴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때문이었다.
빠듯한 수입으로 여행 경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아내는
은근히 추파를 던져오던 부동산 사장을 제 발로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다.
T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떠난 지 한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실종신고를 내고 남편의 방에 쌓여 있는 책 더미 속을 뒤진다.
컴퓨터를 알지 못하는 아내는
파일 속에 담긴 남편의 글과 편지를 찾아 읽지 못한다.
# 인터뷰. 방민호
이야기 속에 또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은 유림이 아빠인 소설가가 나오고 소설가인 남편을 지극정성 보살피고 뒷바라지를 하는 유림이 엄마죠. 이 소설 속에 유림이 아빠는 소설을 제대로 못 씁니다. 발표를 못해요. 등단을 했는데 발표하지 못하는 작가, 그런 작가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1년 안에 다시 발표를 하면서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한국 작가들에게는 잘 주어져 있지 않고, 그런 현실을 유림이 아빠를 통해서 아주 재미있게 설정을 해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쓴 소설은 유림이 엄마나 소설가 T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라진 그의 이야기였다.
한 달 사이 나는 몰라볼 만큼 살이 빠졌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매달렸던 소설은 원고지 천 매 분량이 넘었다.
소설이 책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는 읽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소설을 탈고하는 순간 나는 그를 떠나보냈다.
내가 이 집을 나서는 순간 그의 존재는 완벽하게 사라지고
오로지 활자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작가 서성란 (전라북도 익산, 1967~ )
- 등단 : 1996년 중편소설 [할머니의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