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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고독의 해자 - 이경자

2023-04-04

ⓒ Getty Images Bank

엄마는 방에 있었다.  

엄마의 공부방이었다.

책은 아무 데서나 읽지만 소설을 쓸 땐,

꼭 엄마의 공부방에서 썼다.


정화는 공부방 앞으로 가랑잎 밀리듯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엄마의 등이 보였다.

볼펜을 움직이는 오른 쪽 어깨가 안으로 조금 기울어진 뒷모습이었다.


정화는 엄마가 제 기척을 느껴주길, 그리고 의자를 돌려

‘정화니? 잘 놀았어? 이리 와봐, 그래~’ 하면서

안아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쇠붙이 같았다.


- 방송 내용 중 일부 



좋은 날도 많았다.

엄마는 쓰던 소설이 끝나면 딴사람으로 바뀌었다.

부엌에서 맛있는 것을 해주고

엄마의 친구들 집에도 데려가서 하루 종일 놀기도 했다.

아마 이런 날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정화는 엄마를 이해해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 방에서 지내거나 소설을 쓰기 위해 취재를 다니는 날이 많았다고,

엄마는 다른 엄마와 달랐다고, 

분노와 슬픔을 무릅쓰고 생각했다. 



# 인터뷰. 전소영

작중에 등장하는 여성 작가도 작가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삼중의 삶을 살아냈는데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입었어요. 작가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창작의 고통이나 외로움도 감내해야 했고, 그 과정을 경멸하거나 그 때문에 자기를 냉정하게 대하는 남편과 딸로 인해서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가족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작가로서도 살아가야 하는 여성 작가의 상처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고독으로 둘러싸인 해자, 고독의 해자인 셈이죠. 이 작품은 이렇듯 가족이나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고독을 안고 사는 작가의 삶에 대해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 순간, 문득 소설가 아내가 느껴졌다.

그 여자가 멀리서 손을 흔드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푸른 나무들로 빼곡한 언덕, 

그 아래 깊은 물이 가득 찬 해자가 있었다.

해자 속에 아주 작은 오두막 한 채, 거기 아내가 앉아 있었다.


작디작은 몸의 여자,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나 잡을 수 없는 사람 하나가 거기 있었다.




작가 이경자 (강원도 양양, 1948.01.28~ )

    - 등단 : 1973년 단편소설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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