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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모들의 집 - 이경란

2023-03-21

ⓒ Getty Images Bank

처음 사람을 들이기로 했을 때 유진은 진형에게 키득거리며 물었다.

“다들 이모라고 부른대. 왜 이모야? 고모가 아니고” 

진형이 한심해하는 눈으로 바라봤고, 그 눈빛 때문에 유진은 웃음이 딱 멎었다.

“고모 분식 있는 거 봤냐?”      

그 때 일이 떠오르자 새삼스럽게 불쾌해졌다.    


유진에게는 원래 이모가 없었는데 최근 2년 동안 다섯 명이 생겼다.

삼 개월짜리 이모도 있었고, 육 개월짜리 이모도 있었다.

한 번은 열흘짜리 이모도 왔다 갔다.

지금 이모인 복례는 그럭저럭 오 개월째에 접어들었다.


“다른 집 이모들은 몇 년을 간다는데 우리 집 이모들은 왜 이 모양일까?”


- 방송 내용 중 일부 



아버지는 유진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깨워서 일어나 보면 식탁에 아침이 차려져 있었고

말끔하게 다려진 교복이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첫 생리를 시작하기도 전에 생리대를 사이즈별로 사다 욕실 장에 채워두기까지 했다.

유진은 엄마 외에는 자신의 인생에 부족함이 없다고 확신했다.

결혼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하얀 코렐 식기 대신 단아한 자기 그릇을,

커다란 머그컵 대신 유럽산 티 세트를,

맑은 소리가 나는 와인 잔과 화려한 샐러드 볼을 사면서

유진은 생존과 생활의 차이를 실감했다.


통째로 세탁하는 차렵이불로 사계절을 나던 아버지와의 시간은

누리는 삶이 아니라 버티는 삶이었음도.                  


“안방 이불장에서 내 이불 꺼내 쓰지 마세요, 라고 말했어야 했나?

 순영에게 새 이부자리를 한 채 마련해주어야 했나~”



# 인터뷰. 전소영

유진에게는 어머니뻘 여성과의 교감이라는 것이 사실은 쉽지 않았죠. 그런데 순영 이모의 행동을 보면 마치 딸네 집에 온 친정엄마처럼 이불도 쓰고 식기도 마음대로 쓰고 있어요. 그녀의 사연이 세세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갈 곳이 없어서 자식들과 거리가 있어서 종래 유진의 집으로 온 것일 수도 있죠. 

어쩌면 순영 이모에게는 유진이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지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생겨나긴 하지만 또 둘이 각각 그런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화해의 복선이 되고 있습니다.



진형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민수를 침대에 뉘였고,

유진은 신을 벗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식탁 위에 유진이 혼수로 해온 서브마린 파리스 클래식 잔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집들이 이 후로 꺼내 쓴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유진은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들고 개수대로 가져다 놓았다.

잔 하나는 이가 빠져 있었다.


민수의 방문 앞에 선 진형과 싱크대 앞에 선 유진이 

동시에 양모 이불 발치로 다가갔다.

잠깐 마주친 두 사람의 눈길은 동시에 이불 쪽으로 옮아갔다.

잠든 이모들은 어쩌면 저토록 평화로울 수 있을까 싶은 표정이었다.


진형이 에어컨을, 유진이 티브이를 껐다.

두 사람은 가만한 몸짓으로 안방으로 들어간 다음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작가 이경란 (대구광역시)

    - 등단 : 2018년 신춘문예 소설 [오늘의 루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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